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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혈사에 숨었다가 왕이 된 고려 현종(高麗 顯宗)

출생지 / 경기도 개성. 한 때 진관동 신혈사에 거주.

신혈사(神穴寺)에 숨었다가 왕이 된 고려 현종

삼각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진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로 예로부터 동 불암사(佛巖寺), 서 진관사(津寬寺), 남 삼막사(三幕寺), 북 승가사(僧伽寺)라 하여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일컬어졌다.
성능(聖能) 스님이 편찬한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신혈사(新穴寺) 신혈사(新穴寺)는 신혈사(神穴寺)의 오기이다.
라 하였다고 한다.

이 진관사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해온다.
고려 제5대 왕 경종(景宗)에게는 모두 4명의 왕비가 있었다. 제1왕비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공주인 헌숙왕후(獻肅王后), 제2왕비는 태조의 아들이자 광종의 친동생인 문원대왕 정(文元大王 貞)의 딸인 헌의왕후(獻懿王后) 유씨(劉氏), 제3왕비가 흔히 천추태후(千秋太后)로 유명한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 제4왕비가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인데, 두 왕후는 4대 광종의 이복 동생인 추존왕(追尊王) 대종(戴宗)의 딸이었다. 경종에게는 세 번째 왕비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 유일한 핏줄인 송(誦)을 두고 있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송이 2살로 어렸으므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경종의 4촌 동생이자 송의 숙부인 치(治)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6대 왕인 성종(成宗)이다.
성종이 재위 16년만에 사망했을 때 그에게는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으므로 경종의 아들 송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7대 왕인 목종(穆宗)이다.
목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자처하여 천추전에 기거하며 자신을 천추태후(千秋太后)라 칭하게 하였다.
그 뒤 홀로 지내던 천추태후는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했다. 성종 재위 시절, 왕이자 오빠되는 성종은 진노하여 두 사람을 멀리 귀양 보냈으나, 이제 자신의 세상을 만난 천추태후는 즉시 김치양을 대궐로 불러들여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자 기세등등해진 김치양은 궁궐 못지 않은 3백여 간짜리 화려한 집을 짓고 살면서 자신에게 아첨하는 무리들과 함께 온갖 행패를 부렸다.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장차 이 아이로써 왕위를 계승시킬 생각을 갖고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천추태후는 목종이 자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
김치양과 천추태후에게 전권을 빼앗긴 목종은 그만 의욕을 상실하고 향락생활로 빠져들었다. 정치를 외면하고 술과 사냥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목종은 그만 동성애에 탐닉하게 된다. 그 대상자는 유행간(庾行簡, ?∼1009) 과 유충정(劉忠精)이란 인물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왕의 총애를 믿고서 정사를 간섭하며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자신의 혈육으로 왕위를 계승시키는데 또 다른 걸림돌인 인물이 있었다. 바로 경종의 왕비이자 천추태후의 여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의 아들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그였다. 그는 어머니 헌정왕후가 남편인 경종의 사후 사가에 머물다가 삼촌격인 태조의 8남 안종(安宗) 욱(郁)과 불륜을 저질러 낳은 아들이었다.
“우선, 대량원군을 멀리 내쳐야겠어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 아이가 살아 있고선 우리 아이가 보위를 계승하는데 장애만 될 뿐입니다.”
천추태후가 김치양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자, 김치양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인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치양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우선 대량원군을 출가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중이 되게 한다고 왕위 계승자의 위치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하겠지요.”
천추태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응수했다.
“차후의 일은 신이 알아서 할 것이오니 마마께선 그저 대량원군을 절로 내치시기만 하시지요.”
다음날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삭발시켜 개경의 숭교사(崇敎寺)로 내쫓았다. 숭교사는 1000년(목종 3) 10월에 목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는데, 얼마 뒤 대량원군이 천추태후의 미움을 받아 이곳으로 귀양온 것이다.
그날 밤 한 승려가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대량원군이 삭발하고 숭교사를 찾아왔으므로 승려들은 지성으로 섬기며 자객들로부터 지켜주었다.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고려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목종 9)에 삼각산 신혈사(神穴寺, 현재 서울 진관사의 전신)로 거처를 옮겨갔다. 신혈사지는 현재 삼천사 입구 사슴목장 자리이다. 대량원군은 신혈사로 옮겨간 후 신혈소군(神穴小君)이라 불렸다. 고려시대엔 왕위계승권이 미약한 왕자를 소군이라 하여 출가시켜 그 계승권을 박탈시켰는데, 그 시초가 되었다.
당시 신혈사는 진관(津寬)이라는 노승 하나만 수련하고 있는 작은 암자였다.
어느 날 그는 무료함을 달랠 겸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 2수를 써내려 갔다. 멀지 않아 보위에 오르리라는 암시의 시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오는 2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대량원군이 붓을 휘둘러 먼저 “시냇물(溪水)”이란 시를 지었다.

“시냇물(溪水)”

백운봉(白雲峰)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의 물,
만경창파 멀고 먼 바다로 향하누나!
바위 밑을 스며 흐르는 물 적다고 하지 마라,
용궁에 도달할 날 그리 멀지 않으리.

一條流出白雲峯 萬里滄溟去路通
莫道潺湲巖下在 不多時日到龍宮


연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작은 뱀(小蛇)”이란 제목의 시였다.

“작은 뱀(小蛇)”

약포에 도사리고 앉은 작고 작은 저 뱀,
온몸에 붉은 무늬 찬란히 번쩍이네!
언제나 꽃밭에만 있다고 말하지 마라,
하루아침 용 되기란 어렵지 않으리니!.

小小蛇兒繞藥欄 滿身紅錦自斑欄
莫言長在花林下 一旦成龍也不難

위 시에서 용궁은 왕궁을 의미하고, 용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지켜 본 진관 스님은 그가 장차 임금이 될 뜻이 있음을 짐작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시로군요.”
“시재(詩才)가 없어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훌륭한 시입니다. 소승이 앞으로 지성으로 보살펴드릴 것이 오니 아무 걱정 마시고 이곳에서 편히 머무르시지요”
“고맙습니다.”
이러는 사이 김치양의 암살음모도 박차를 가해갔다. 어느 날 김치양이 보낸 자객이 신혈사로 들어닥쳤다. 망을 보던 동자승이 즉시 진관조사(津寬祖師)에게 알리자 이미 이들의 간계(奸計)를 간파한 진관조사는 법당 본존불(本尊佛)을 봉안한 수미단(須彌壇) 밑에 굴을 파고 당시 12세의 어린 왕자였던 대량원군을 숨겨주어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도록 조치한다.
“선재(禪齋) 스님, 어서 굴속으로 몸을 피하시지요.”
“고맙습니다. 내 훗날 이 은혠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선재 스님은 대량원군의 법호(法號)였다. 곧 들이닥친 자객이 대량원군의 소재를 묻는다.
“지금, 대량소군은 어디 있소? 소군께 드리고자 술과 떡을 조금 가져 왔소.”
“지금 선재(禪齋) 스님께오선 산에 출타중이시오.”
“그럼 언제쯤 돌아올 것 같소?”
“그야 소승이 어찌 알겠소? 워낙 바람같은 분이시니..”
“그럼 예서 좀 기다리겠소.”
“그리들 하시지요.”
몇 시간을 기다리다 지친 자객들은 직접 찾아나서겠다며 절을 떠나갔다. 하지만 언제 또 나타날 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자객들이 가져온 음식을 버리니 산새들이 먹고 죽어 여기 저기 쓰러졌다.
왕이 또 어느 날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고 술사(術士)에게 물었더니 술사가 속담으로 해몽하기를 “닭울음은 꼬끼요[鷄鳴高貴位],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어근당[砧響御近當]하니 이 꿈은 왕위에 오를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이 꿈이 적중했던지 신혈사에서 4년간(1006-1009)을 보낸 대량원군은 목종이 죽자 왕의 유언에 따라 개경으로 돌아가 목종 12년(1009) 2월 기축일에 연총전(延寵殿)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려 8대 왕인 현종(顯宗)이다.
이런 인연으로 현종은 1011년(현종 2)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津寬祖師)의 은혜에 보답코자 신혈사 터에서 약 5km 떨어진 위쪽 현재의 진관사 자리에 새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조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자신이 숨어 지내던 신혈사의 암굴을 ‘신령한 굴’이란 뜻의 신혈(神穴)이라 부르도록 했다.
조선시대 진관동은 신혈사(神穴寺)가 있었기에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라 불려졌고, 그 이후 진관사(津寬寺)를 기준으로 안쪽을 진관내동(津寬內洞), 바깥쪽을 진관외동(津寬外洞)이라 불렀다가 2007년 8월 13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진관동(津寬洞)이 되었다.

◈ 현종(顯宗)

고려의 제8대 왕
재위 : (1009∼1031). 출생-사망 : (992 ~ 1031).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거란 성종의 침입에 참패하였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고, 6성 요구도 거절하였다. 다시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침입하자, 강감찬장군이 이를 섬멸하여 물리쳤다. 이후 거란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대장경의 제작에도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宣陵)이다.

◈ 신혈사지(神穴寺址)
위 치 : 은평구 진관내동 230∼234, 산 54, 산58-60번지 일원

신혈사(新穴寺)는『동문선(東文選)』의「삼각산중수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堀記)」에 의하면 고려 성종 때 여철(如哲) 선사(禪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귀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 선사가 임시로 신혈사에 거주하면서 북한산 승가사(僧伽寺)를 중수할 사무를 맡았다고 하며, 신혈사의 초대 조사(祖師)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는 왕사(王師)인 자응(子膺)의 법윤(法胤)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한편『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8대 왕인 현종(顯宗)이 왕자 시절이던 목종 9년(1006)부터 12년(1009)까지 약 4년간 이 절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후 선종 7년(1090)에는 왕이 신혈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을 위해 재(齋)를 올렸다고 하며, 숙종 4년(1099)과 예종 5년(1110)에도 각각 왕이 이곳에 행차한 기록이 보인다. 조선 태종 조에는 자은종(慈恩宗)계의 대표사찰로 나온다. 『태종실록』7년 12월 조 기사.

고문헌에 신혈사의 위치는 단순히 “삼각산에 있다”고만 나와 있고, 조선 후기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진관사 서북쪽에 ‘신혈사고지(神穴寺古址)’라고만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2004년 완료한 서울역사박물관 지표조사 결과 이곳에선 많은 양의 기와편과 자기편이 확인되었다. 채집 유물로는 기와편, 도기편, 청자편 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당초문 암막새, 귀목문 암막새, 전돌 등이 있으며, 유색이 좋은 양질의 청자편도 채집되었다. 그리고 중국 정요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백자 연판문 접시편이 채집되어 주목된다. 한편, 계곡 건너편에 자리한 음식점으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주좌가 표현된 초석 3기가 위치를 잃은 상태로 놓여 있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식당인 토석정 자체가 근래까지 절이 있었다고 하며, 사슴목장 주변을 신혈사지(神穴寺址)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절터는 음식점과 사슴목장으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이며, 사지의 이름과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학술조사와 적절한 보전대책 수립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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